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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첫 진단

윤구현 2011. 7. 28. 15:05
만성질환이나 희귀, 난치성 질환을 처음 진단 받는 것은 인생에서 큰 변화의 시작입니다. 좋아하던 음식을 전처럼 자주 먹을 수 없게 될 수도, 좋아하던 취미를 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을 잃거나 바꿔야 할 수도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의 시작이기도 하죠. 

만성B형간염은 다행스럽게도 일상생활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먹는 것, 운동, 취미 생활을 바꿔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술을 좋아하던 분들, 대인관계의 대부분을 술로 해오던 분들은 술을 끊거나 줄이는 것을 힘들어 하고 치료를 받는 분들은 경제적인 부담이 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에 영향을 주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처음 진단받았을 때의 경험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의료인이 아닌 이상 특정한 질병에 대한 사전 지식은 거의 없고 의료인이라고 하더라도 평소 자신이 관심을 갖던 질병이 아니라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첫 진단의 순간 모든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1995년 5월 첫 주 B형간염을 진단받았습니다. 군에 입대하고 첫 번째 휴가에서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휴가를 다녀오는 동안 훈련소에서 한 헌혈결과가 부대로 통보되었는데 거기에 적혀 있었던 거죠. 제가 군에 입대한 1994년에는 입대할 때 B형간염 검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의무병으로 군생활을 했습니다. 휴가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함께 근무하는 군의관(인턴을 마치고 입대한 중위였습니다)께서 부르더니 30분 정도 B형간염이 어떤 병인지 설명해주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그날 들은 내용의 많은 것은 맞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B형간염에 대한 지식은 지금과 차이가 있었고 인턴을 마치고 입대한 군의관이 그 전에 B형간염환자를 직접 진료하거나 치료한 적도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꼭 필요한 내용은 정확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야 하고, 단체생활을 하는 군대라고 해도 감염예방을 위해 특별히 주의할 것은 없다는 것이죠. 군에 입대한 B형간염보유자들은 식판과 숟가락을 따로 쓰라고 강요 받는 일이 흔합니다. B형간염은 음식이나 식기로 전염되지 않지만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음식과 식기로 전염된다면 대한민국 모든 식당들은 멸균 소독기를 두어야 할 겁니다).
그 군의관은 저와 함께 생활하는 고참들에게(여섯 명이 생활하는 의무지대였기 때문에 제가 막내였습니다) 면도기와 칫솔을 따로 쓰는 것 이외에 특별히 주의할 것이 없다고 말해주었고 이후 궁금한 것을 물을 때마다 잘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매일 간암환자와 중증 간경변증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에게 갓 B형간염을 진단받은 20대 초반의 무증상보유자(건강보유자)는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적은 환자일 것입니다. 정기적인 검사 이외에 특별히 할 것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당사자는 갑자기 닥쳐온 삶의 변화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물을 곳은 병원 밖에 없는데 의사는 잘 대답해주지도 않습니다. 진료시간은 짧은데 의사가 보기에는 별 쓸데 없는 것들을 궁금해 하거든요. 아니 보통은 의사에게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르고 의사의 설명 대부분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저 역시 그런 것 같습니다. 꼴에 조금 더 안다고 말도 안 되는 질문, 간사랑동우회를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질문에 답답해하고 소홀히 대답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10년 전 간사랑동우회가 시작된 한상률 선생님의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제가 군대에서 처음 B형간염을 진단받았을 때 얻은 혜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처음 B형간염이라는 병을 진단받았을 때 30분 정도 자세한 설명을 들은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들은 설명이 맞는지, 맞지 않은지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삶의 변화에 적응하는데 시간과 도움이 필요한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제가 간사랑동우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매일 올라오는 비슷한 질문에 답을 드리는 데는 제가 처음 B형간염을 진단받았을 때 받은 이런 혜택을 돌려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1995년 5월 저에게 B형간염에 대해 설명해준 군의관이 없었다면 간사랑동우회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벌써 제대한지 14년이 흘렀습니다. 군에 있을 때 모시던 군의관이 여러분인데 지금 생각나는 이름은 그 분 뿐입니다. 몇 년 전부터 생각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찾았는데 지난달 드디어 강남역에서 안과를 개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푸른성모안과 김경락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진은 푸른성모안과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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