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난 달 말 청년의사에서 주최한 좌담회에 참석했습니다. 간단한 발표를 했고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이유로 옥신각신할 일도 있었습니다. 끝나고 나오는데 의도하지 않은 선물 두 가지를 받았습니다. 천안에서 근무하시는 교수님이 호두과자라는 센스있는 기념품을 나눠주셨고 다른 하나는 청년의사 박재영 편집주간님이 쓰신 소설 '종합병원 2.0'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방송된 MBC 드라마 때문에 꽤 유명한 소설이었는데 대학 졸업한 이후에 소설을 잘 읽지 않는터라 주변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책 표지만 여러번 본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지난 주부터 꺼내들었습니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한 150쪽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남아 있는 양은 낮에 출장으로 이동하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 다 읽을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의사선생님들이 쓴 책은 저처럼 규칙적으로 병원을 다녀야 하고 일때문에 의사선생님을 자주 만나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도움이 됩니다. 어떤 생각으로 환자를 보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종합병원2.0'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그러나 불가피한 오진들, 의약분업, 환자와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생기는 에피소드들, 인턴과 레지던트의 고단한 일상... 그런그런 이야기겠구나 하는 생각은 250쪽쯤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 책의 말미 대부분은 교통사고로 뇌사에 빠진 한 레지던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읽는 의사선생님들은 기억하고 있을 1999년 2월에 실재 있었던 사고입니다. 새벽 출근을 하던 레지던트 한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을 했고 홀로 아들을 기르던(제 기억으로는 외아들이었던) 어머니는 장기이식에 동의해 여러 명의 생명을 살려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는 장면에서... 그 사고가 새벽에 택시를 타다난 사고라는 설정에서... 그리고 사고 당사자의 이름이 '임상준'이라는 것에서.... 저자인 박재영 선생님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출신이라는 것에서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는 것과 그 주인공이 그 "선배"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그 분은 고등학교 "선배"입니다. 고등학교에서는 흔하지 않은 동아리의 2년 선배였고 1학년 2학기에야 들어간 동아리였기 때문에 3학년 "선배"의 얼굴을 볼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흔치 않은 '학교에서 인정하지 않은 토론 동아리'라는 특이한 동아리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썩 좋은 눈초리로 보지 않는 동아리였는데 1990년 전교조 사태로 전국이 들썩였을 때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해직교사가 여섯 명이었고 학생들이 잠시나마 수업거부를 선언하고 운동장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위'를 주도한 것들이 우리 동아리 선배들이었고 그 "선배"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은 아무도 징계를 받지 않았는데 교사 여섯 명을 해직시키는 학교도 전교 1, 2등을 다투는 학생이 포함된, 주동자 서너명은 소위 전교 순위권에 있는 고3들을 징계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고등학생 답지는 않았지만 "그 선배"와의 기억 대부분은 술자리 였습니다. 매년 백일주 마시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았으니까요. 고등학교 1학년 선배들의 백일주 자리에서 처음으로 소주를 한 병이상 마셨고 그 후에도 매년 그 행사는 거르지 않았습니다. 참 착하고 성격좋은 선배이지만 별명이 '인민무력부장'이었던 선배가 주는 술잔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죠.
그 선배가 외과 레지던트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처음으로 떠올랐던 생각이 그 큰손으로 수술을 할 수 있었을까였습니다. 큰 덩치에 큰 손,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산적 역할이 딱 맞는 그런 선배였습니다.

제가 선배의 부고를 들은 것은 사고 한 달쯤 지난 99년 3월, 첫 직장을 들어가고 오랜만에 찾아간 고등학교 친구의 가게에서 였습니다. 제게 처음 든 생각은 왜 하늘은 가끔 좋은 사람을 먼저 데려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기 기증으로 서너명의 생명을 살렸다고 하지만 살아있었다면 그보다 수백배, 수천배의 생명은 살렸을 사람이었으니까요.

지난 달 닥블 모임에서 박재영 선생님을 만나기전 이 책을 읽었더라면 맥주 한 캔이 아닌 소주 서너병을 함께 마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동아리 친구들 대부분과는 오래전에 연락이 끊겼고 가끔이나마 연락하는 친구는 필리핀에 있기 때문에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배"의 10주기를 기념한 책 같습니다.
언제 신촌에 들려 "선배"의 동료들이 심은 나무라도 찾아봐야겠습니다.



종합병원 2.0: 호모 인펙티쿠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재영 (청년의사, 2008년)
상세보기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요일. 33도 폭염속에서 자전거를 탔더니...  (6) 2009.08.10
된장녀 조기교육  (3) 2009.07.13
득템 - 스타벅스 젤리 팔찌.  (2) 2009.07.08
우울함...  (4) 2009.05.14
요즘 환자모드...  (0) 2009.03.30
종합병원2.0을 읽다 울었습니다.  (5) 2009.03.17
댓글
  • 프로필사진 양깡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저도 그 부분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었습니다. 2009.03.17 11:14
  • 프로필사진 윤구현 학교 선배이시죠?
    조금 전에 "선배"와 동기인 다른 선배와 통화했는데
    또 슬퍼지네요...
    2009.03.17 12:09 신고
  • 프로필사진 만화항생제 세란극회 연극 '라쇼몽'에 출연하셨습니다. 산적(?)역이어서 캐스팅 잘 했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내과 레지던트이셨구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9.03.17 12:43
  • 프로필사진 윤구현 내과였군요...

    오래된 기억은 이래서 문제가...
    2009.03.17 12:56
  • 프로필사진 닥터 검프 제가 전공의 시절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3년차 때였던 것 같네요. 그 때 수술실로 들어가던 때 온 몸이 전율에 휩싸였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 심었던 나무가 얼마나 자랐을까요. 보고 싶네요. 2009.03.31 21:59
댓글쓰기 폼